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반 일리치의 죽음
가이우스란 것은 마땅히 죽어야한다. 그에게 있어서는 죽는 다는 것이 정당한 것이다. 그렇지만, 바냐, 즉 무수한 감정과 사상을 가진 이반 일리치에게는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바로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너무나 무서운 일이다.
전에는 전혀 있을 수 없다고 생각되던 일, 즉 자신은 지금까지 잘못 살아왔다고 하는 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문득 떠올랐다. 사회에서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는 일에 대해, 내가 반대하려고 했던 극히 희미한 마음의 움직임, 그가 항상 곧 몰아내자, 몰아내고자 했던, 오직 그것만이 진짜이며 나머지 것은 모두 가짜일지도 모른다! 그는 이러한 이러한 모든것들을 위해 자신을 변호하려고 했다. 그러나 갑자기 자신이 변호하고 있는 것이 너무도 취약하다는 것을 감지했다. 변호해야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내가 보고 내가 듣고 내가 느끼는 무언가들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같은 일을 겪고 같은 생각과 느낌을 갖는 존재는 오직 나 하나이기 때문에 나는 이 삶을 살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러한 독특한 유일성은 나를 결코 다른 존재로 대체할 수 없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나와 다른 사람을 구분짓는 자아를 갖으며 인간의 존엄성을 확립시켰다.
이러한 측면에서, 죽음에 대한 이반 일리치의 반응은 매우 일반적이다. 인간은 죽는다는 걸 모두 알면서도 그 누구도 자신의 죽음을 느끼지 못한다. 내 몸은 죽지만, 나는 죽음을 느낄 수 없으므로 결코 죽음의 경험을 하지 못한다. 그런 인간이 어찌 죽음을 인지하고 인정할 수 있을까.
이반 일리치가 자신의 죽음을 부정하고 있을 때 조차, 그 주변인들은 낌세를 알아채고 전과는 다르게 그를 대하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나’로 바라보고 있지 않고, 그보다는 내가 갖고 있는 ‘재산’, 나의 ‘직업’, 사회적 ‘위치’ 등으로 나를 평가한다. 즉, ‘나’라는 개체가 아니라 다른 무엇(재산, 지위, 사람)과의 ‘관계’들로 나를 규정한다.
예상하지 못했던 타인들의 시선과 대함에 충격을 받은 이반 일리치는 곧,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나의 죽음에 냉담하고 철저히 외부인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 사람들이 바로 과거의 ‘나’였다. 죽음에 가까워지면서 타인의 속내를 알게 된 이반 일리치는 이를 통해 비로소 ‘나’를 알게되었다.
죽음은 나를 객관화 시켜야만 볼 수 있다. 나라는 존재도 다른 여타 생명체들과 같은 인간일 뿐임을 인정해야만, 삶에 따르는 죽음 또한 이해할 수 있다. 이 부분에서 불교 사상이 연결된다. 모든 번뇌는 외부요인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내가 화를 내는 행위라고 한다. 결국 번뇌의 주체는 ‘나’이므로, 감정에 휩싸인 나를 객관화 시킴으로써 감정/생각을 정확하게 대할 수 있다고 한다. 이반 일리치에게도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그것을 두려워하는 이반 일리치의 감정이다. 이를 객관화 시키고, 결국 인간 모두가 다 죽는다는 것을 깨닫고 난 후, 그는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