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고네: 내게 그런 포고령을 내린 것은 제우스가 아니었으며, 하계의 신들과 함께 사시는 정의의 여신께서도 사람들 사이에 그런 법을 세우지 않았으니까요. 나 또한 한낱 인간에 불과한 그대의 포고령이 신들의 변함없는 불문율들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고는 생각지 않았어요. 그 불문율들은 어제 오늘에 생긴 게 아니라 영원히 살아있고,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나는 한 인간의 의지가 두려워 그 불문율들을 어김으로써 신들 앞에서 벌 받고 싶지 않았어요.
흔히들 말하는 슬픈 결말의 영화와 드라마에서 말하는 힘든 시련은 철학과 문학 시간에서 말하고자 하는 비극과는 차이가 있다. ‘나’라는 한 개체가 속한 두 세계의 간극에서 빚어지는 갈등, 이를 우리는 비극이라고 한다.
오이디푸스 문학 작품은 비극의 최후를 정말 비극적으로 그려내었다. 신과 인간 세계에서의 간극을 더 벌리려는 과정 속에서 나온 오이디푸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 ‘안티고네’에서 인물들은 “국가”에 속한 ‘나’와 “가족”에 속한 ‘나’ 사이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된다.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의 말에 따르면 가장 죄 없는 여인인 안티고네가 어찌하여 크레온에게는 공동체를 위협할 수 있는 반역자가 될 수 있는지. <안티고네>에서 안티고네가 마주한 상황에서 국가를 택할 것인가 가족애를 택할 것인가라는 선택은 어느 한 쪽의 정당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어느 것이라도 큰 손해를 가져온다. 따라서, 비극에서는 간극을 사이에 둔 두 관점에대한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중적 존재로서의 우리가 겪는 비극의 해결은 내가 갖고 있는 가치관의 확립을 시발점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러한 표면적인 두 가치관의 충돌은 <안티고네>에 쓰여있으니 차치하더라도, 나는 안티고네가 따르고자 했던 불문율에 의문을 품고 이 글을 쓰게되었다. 언제 어디서 생겼는지 모르는 이 불문율을 우리는 전통, 관념, 사회적 통념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사회 구성원들이 암묵적으로 합의하는 이러한 규칙들은 과연 영원히 살아 있는가? 크게 보면 시대가 흐르고 사회 구성원들이 변화함에 따라, 작게 보아 우리가 마주하는 상황에 따라 각자가 갖게되는 불문율은 크게 변한다. 구성원간의 최소한의 약속이며, 문서로 규정되어있는 법조차도 이해관계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인간 사회에서, Flow 처럼 계속 변해가는 불문율을 따른 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뜻인가. 물론, 가족애는 인간이 정착생활을 하기 시작했을 때 부터 내려온 우리를 지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써 불문율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중요성이나 역할 그리고 사회가 기대하는 정도의 차이는 시대마다 변화하여왔다. 이처럼 불문율은 시대에 따라 다르고 사람마다 다르니, 신뢰성이 없는 것일까? 아니다. 반대로 나는 오히려 이러한 암묵적인 합의가 사회를 구성하는 더 큰 힘이라고 믿는다. 위에서 보았듯이 계속 변화하고 흘러가는 ‘불문율’은 더 세심하게 더 많이 사회적으로 논의가 이루어져야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비극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계속 된다. 비극의 역사가 곧 진보의 역사라 할 만큼 우리는 끝임없이 선택의 순간에서 갈등하며 ‘나’의 옳은 선택은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역사를 만들어간다. 가까이는 용산참사와 촛불시위에서부터 근대의 518 광주민주화운동에서 드러난 폭력은 ‘비극’이다. 그들의 행동을 단순히 상부 명령에 대한 복종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부당하다. 불법점거를 하는 용산 원주민들을 내쫓는 행위는 분명 법적으로 하자가 없었다. 오히려 공권력의 행사에 있어서 법 이외의 사회적 불문율(합의)에 적합한가를 살펴보았어야한다.
인간은 분명 부족한 존재이다. 그렇기에 서로 부족한 점을 보완해가며 살아가야한다. 갈등을 둘러싼 대화는 분명 그 간극을 이어주는 가교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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