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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독서

필경사 바틀비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

 



  언젠가부터 아무런 이유도 변명도 하지 않은채 ‘I would prefer not to’만을 말하는 바틀비를 바라보며 이 이야기의 끝에는 이 대답이 어떻게 바뀔까 궁금했다. 열심히 일했던 필경사였기에, 이러한 심정의 변화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고 사건이 흘러감에 따라 그 원인을 해결하고 다시 활기를 얻는 그런 식의 이야기를 기대했었다. 하지만 바틀비의 대답은 그의 죽음에 다다라서도 변하지 않았다. 과연 무엇을 향한 반항이었을까?


  우선, 그가 일했던 사무실로부터 이유를 찾아보고자 했다. 자본주의의 메카라고 불리우는 월 스트리트의 창문 밖으로는 오직 다른 건물의 (Wall)’ 만을 마주하는 사무실에서 그들은 살아가고 있었다. 글의 화자는 굳이 누군가를 이기려하거나 경쟁하는 것은 아니지만,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거스르지 않고 언제나 자신을 발전시키고 적응해나가는 소위 성공한 인물이다. 월스트리트로 대변되는 현대사회에서는 의식하지 못한채 나의 의지는 사회가 바라는 대로 유도된다. 변호사인 화자는 그러한 대표적인 유형이다.

  바틀비가 모든 것을 거부하는 과정속에서, 환경에 잘 적응하는 화자는 자신 나름대로 바틀비를 달래려 노력한다. 힘을 복돋아 주기도 하고,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주기도 하면서 다시 무언가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한다. 하지만 이 모든것을 바틀비는 되도않는 이유를 들어가며 ‘I would prefer not to’ 거절한다. 이는 화자가 바틀비가 무엇에 대항하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한채,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관에서 최선의 것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더 나은 환경의 사무실, 더 나은 조건의 직업 등은 화자가 추구하는 성공한 삶이자 바틀비가 대항하는 그 것이다.

 내가 무엇을 추구하고 싶은지, 그 가치관조차도 사회가 바라는 방향으로 맞추어야만 하는 환경적 강요가 바로 바틀비가 ‘I would prefer not to’하는 것이다. 그의 반항은 사회의 바람이 곧 나의 추구가 되어버린 화자나 주위의 성공의 잣대가 내 행복의 잣대가 되어버린 현대사회의 행태들을 꼬집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반항의 대상이 오직 자본주의에서 자본가와 노동자 관계만을 이야기한다고 보지 않는다. 그보다 더 넓은 범위에서 사회가 개인에게 주는 의식에 대한 강요, 여기에 더 무게를 둔다.


  바틸다는 끝내 벽을 바라보며 웅크린 채 죽음을 맞이한다. 책의 시작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키워드 ’. 바틸다는 주위의 제안과 시선을 거부하면서도, 끝끝내(정신병원과 같은 감옥에 끌려가기 전까지) 벽으로 둘러싸인 월()스트리트의 사무실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바틸다의 거절들은 결코 소극적이라 볼 수 없다. 그는 자신이 대항하는 그 벽에서 떠나지 않고 오히려 끝까지 그 앞에서 자신의 거절을 드러내고 사회에 반항했기 때문이다.

  바틸다 그가 자리를 지키며 외쳤던 단 한 문장I would prefer not to가 머릿속을 멤돌다, 고공 크레인위에서 바틸다의 자리를 지키며 사회에 대항했던 김진숙씨가 떠올랐다.